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탈린그라드 전투 (문단 편집) === 독일군의 대응 ===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수비는 [[루마니아군]] 3군과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부분의 방어선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로 자국산 장비로 무장했으나 보급 한계로 독일군에게 추가 지원을 받았는데, 이때의 주 장비라는 게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에서 노획한 장비에다 그 수마저도 적었다.] 루마니아군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꾸준한 정찰을 통해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 대규모의 소련군 부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전력으로 집결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마니아 3군은 즉각적인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이외에도 이탈리아군, 헝가리군과 심지어 독일군까지 사령부에 계속 지원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정보 분석을 통해 루마니아 3군이 보고한 북부에 집결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로 들어가는 철도선을 차단하기 위한 제한된 공세를 위한 병력이라고 판단하였고, 루마니아 3군의 요청을 거절했다. 독일군이 이런 전략적 실수를 범한 것은 소련군의 현란한 기만책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가을 내내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에게 소소한 공세를 꾸준히 가했고, 더하여 소련군 사령부는 겨울부터는 방어에만 집중하라는 장문의 가짜 명령을 연일 무선 통신으로 뿌려댔다. 마지막으로 전략 예비대는 모스크바 주변에 꽁꽁 숨겨서 독일군의 정찰을 회피했다. 그렇지만 결국 각종 정찰과 포로 심문을 통해 독일 육군총사령부 동부정보국 측에서도 이를 알고는 있었다. 문제는 소련군의 전략 예비대 규모[* 73개 소총병사단, 86개 전차여단 및 기타 전투 지원 부대.]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였으나, 앞서 언급한 소련군 사령부의 기만책에 휘말려 이들이 동계 반격 작전에는 투입되지 않고, 방어에 전념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도 측면의 취약성을 지적하며 히틀러의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집착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히틀러는 소련군의 병력 증강에 대한 정보를 허무맹랑한 일로 일축하면서, 10월 중순 총참모장을 할더에서 쿠르트 차이츨러로 교체하였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 있던 독일 국방군 B집단군 북방 200km에 이르는 전선은 매우 취약한 상태로 적에게 노출됐고 1~2킬로미터의 전선을 일개 소대가 맡는 꼴이 되어버렸다. 방어를 담당한 루마니아군은 B집단군 사령부에 계속적으로 병력 증원과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사령부는 48기갑군단을 파견했지만 이 정도 전력으로 소련군의 작정하고 준비한 공세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측면 구역을 독일군이 방어해야 했으나, 소련군을 얕잡아 본 독일 육군총사령부의 오판으로 인해 작전 규모가 지나치게 확대됐고[* 집단군을 둘로 나눠 하나는 캅카스로 하나는 스탈린그라드로 보내버렸다.] 결론적으로 캅카스와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동시에 유지한다는 것은 당시 독일군의 역량으로는 무리였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